일사 1894년 6월 20일(좌), 일사 1894년 11월 25일(우)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일사(日史)
전라도 강진 작천에 살던 유생 강재(剛齋) 박기현(朴冀鉉, 1864-1913)이 남긴 일기이다. 박기현은 강진 옴천에서 태어나 어려서 병영으로 이사하였으며, 당시 강진 수양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오남 김한섭(1838-1894), 연파 김병휘(1842-1903), 나주의 겸산 이병수(1855-1951), 능주 출신 일신재 정의림(1845-1910), 장성 출신 송사 기우만(1846-1916), 구례 매전 황현(1855-1910) 등에게서 배우고 이들과 교류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인 1894년 음력 12월 10일 병영성을 。령한 농민군에 의해 집이 불타버려서 같은 해 12월 28일에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로 이사하였으며, 서재를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일사>는 28세인 1891년 7월부터 40세인 1903년까지 13년 동안 써온 일기로 이 시기 장흥과 강진 일대 향촌 사회의 동향과 함께 박기현을 중심으로 하는 인근 유생들과의 교유 관계가 잘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전후한 시기 장흥·강진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 측과 관군 측의 동향, 그리고 장흥·강진 지역을 비롯하여 그 주변에서 전개된 농민군의 활동이나 전투 상황, 관군과 김한섭 등 민보군의 대응, 특히 집강소 시기 강진·장흥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더구나 거의 매일 빠짐없이 일기를 쓰고 있으며, 1894년에는 특히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내용이 매우 풍부하여 장흥·강진 일대의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동학과 관련된 기록은 1893년 1월 14일 이 지역의 대표적 유학자인 김한섭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으며, 같은 해 4월 21일자 일기에는 동학의 교리와 포교 과정, 1892년 가을부터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일어난 교조신원운동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의 활동과 관련하여 다른 자료에서 보이지 않는 흥미로운 내용으로는 <전주화약> 이후 전주성에서 퇴각한 농민군이 장흥 지역의 농민군이 돌아오는 모습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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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사>에 따르면 이때 “동학농민군 3, 40명이 혹 총이나 창을 들고, 혹은 말이나 노새, 당나귀를 타고 촌민들에게 강제로 짐을 지게 하였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이 양양(揚揚)하게 행진하는 것이 마치 부귀한 사람이 고향에 돌아오는 것과 같았다”고 묘사하였다. 농민군들은 전라도 일대를 석권하고 전주성까지 장악하였다가 ‘화약’을 맺고 해산한 사실에 대해 고무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모습은 집강소 활동으로 이어졌다.
<일사>의 6월 20일 일기에는 이 무렵 이미 “장흥군 (부산면) 자라번지(鱉番地)에서 장흥 동학도들이 대회를 열”고 농민군이 “죄 있는 사람” 들을 잡아들여 징치하고 있었다. 이미 6월 19일에도 산성별장을 잡아들였고, 6월 26일에는 “강진 병영의 우후(虞侯)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400냥을 징발하기도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7월 3일자 일기에는 이때 이미 강진에도 농민군 도소가 설치되어 활동하고 있었으며, 농민군들은 성내의 질청(作廳)을 비롯한 관아의 건물들과 인가들을 숙소로 삼고 있었다. 농민군들은 혹은 십여 인 혹은 수십인, 삼사십 인이 길에 끊어지지 않았는데, 서로 부르기를 접장(接長)이라 하였고, 아이들은 동몽접장(童蒙接長)이라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속인(俗人), 자신들은 도인(道人)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2차 봉기 시기 장흥과 강진, 그 주변 일대 농민군의 활동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예컨대 장흥의 농민군은 10월 중순 무렵부터 본격적 기포하기 시작하였다. <일사>에는 이때 농민군이 “장흥 사창시(社倉市)에 1,000여 명이 모였으며, 영암 덕교(德橋)와 강진 석전시(石廛市)에도 계속 모여들었다”고 하였다. 이어 11월 25일에는 이 지역 대접주인 이인환이 봉기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농민군 진압 이후 민보군 등에 의한 보복에 대해서도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고 있다. 곳곳에서 반농민군 집단이 “격분하여 동학농민군을 타살하였”으며, “동학 마을을 불사르고 가산을 몰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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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병사는 진압을 핑계로 농민군이 살전 마을을 찾아가 토색질을 하고 무고한 주민들까지 잡아가서 곤장을 치기도 했다.
이후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단발령, 의병항쟁 등의 내용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아카이브(archive)에는 동학농민혁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1893년 정월부터 1895년 12월까지의 내용만 실려 있다. <일사>는 1999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2년 강진군과 영산원불교대학교에서 공동으로 <강재일사>라는 제목의 번역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강재가 거주하던 집에는 현재 흥운재(興雲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흥운재 바로 왼편에는 1999년에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는 사당 용전사(龍田詞)를 건립하였다. 용전사 앞에는 <강재선생박공단향실적비명(剛齊先生朴公壇享實跡碑銘>이 세워져 있다. 용전사 앞 비문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 지역 수성군을 이끌던 나주 유생 겸산 이병수(李炳壽)(1855∼1941)가 지었다.
임하유고 1894년 1월, 4~5월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 무장기포 관련 내용.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임하유고(林下遺稿)
<임하유고>는 전라도 부안에 살던 유생 김방선(金邦善, 1843∼1901)이 서술한 일기이다. 저자의 자는 익원(益元)이고 임하(林下)는 호이다. 내용은 1894년 1월분 1건, 4월 4일과 7일, 5월 27일, 9월 27, 28, 29일, 10월 1일 등 모두 8건의 기사가 실려 있는 매우 짧은 일기이다. 속표지에 ‘1894년 9월 일 제행일기[甲午 九月 日 濟行日記]’라고 되어 있다. 저자는 1894년 9월 27일 가족과 친지들을 이끌고 제주도로 피난을 떠났으며, 칠산 앞바다를 지났다는 10월 1일 일기로 끝나고 있다. ‘제행일기’는 제주도로 가면서 쓴 일기라는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볼때 1894년 1월부터 5월까지의 일기는 9월에 소급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1월 일기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맞서 전봉준, 정일서, 김도삼 등이 주도하여 고부봉기가 일어난 사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특히 ??임하유고??에는 고부봉기에서 1894년 3월 20일 발발한 무장기포로 이어지는 내밀한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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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봉기가 수개월 이어지는 동안에 전봉준 등 지도부에서는 민가의 총을 거두어들이고, 민가의 농기구로 창과 칼 따위를 만들어 관군과 맞서고자 하였으나, 봉기에 가담한 고부민들 가운데는 그에 반대하는 이견이 있었다. 또 신임 고부군수 박원명(朴源明)이 해산할 것을 간곡히 종용하자 전봉준은 고부봉기가 더 이상 진전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포군(砲軍)’ 50명을 이끌고 무장(茂長)의 대접주 손화중(孫化中)에게로 가서 5,000∼6,000명을 불러 모아 무장(茂長)의 인천(人川)에서 ‘보국안민창의(輔國安民倡義)’라는 쓴 깃발을 들고 봉기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고부봉기에서 무장기포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과정은 다른 자료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에서 매우 의미 있는 내용이다.
4월 4일과 7일조에는 감영군의 대응과 농민군이 백산에 진을 치고 있던 사실, 이어서 황토현의 전투에서 농민군이 감영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사실, 조정에서 홍계훈을 초토사(招討使)로 임명한 사실, 농민군이 영광·무안·함평으로 진격한 사실, 장성에서 농민군과 경군이 전투한 사실, 전주성 전투와 전주화약 등을 간략하지만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집강소 시기 농민군의 모습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동학도가 갈수록 더욱 창궐하여 관의 곡식과 개인의 재화를 마음대로 출납하였는데도 열읍의 수령들은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원망을 품은 무리들과 부랑자들이 다투어 동학으로 들어가 스스로 의병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접주가 출입할 때 기를 들고 나발을 불면서 총포를 쏘는 병사들이 앞뒤로 호위하였다”
9월 27일 저자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난리[時擾之禍]’를 피해 처 신씨와 두 딸, 아우 방훤, 형수 이씨, 조카와 질녀, 속비(贖婢) 순임·김영돌·송청보 등과 함께 부안 염소포(鹽所浦)에서 배를 타고 제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일기의 내용은 매우 짧지만, 고부봉기와 무장기포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전말을 비롯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에서 중요한 대목들을 간결하게 기록해 두고 있으며, 특히 가족과 친지를 이끌고 피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드문 자료이다.
강재 박기현을 추모하는 사당인 용전사
강재일사 저술지인 흥운재
배항섭(전 성균관대 교수)
내밀한 과정을 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