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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협동학교와 파락호 김용환
김정탁 노장사상가
안동에 가면 유력 문중이 많아 어지간해서 큰소리를 못 친다는 말이 있다. 그 유력 문중 가운데 안동 김씨와 안동 권씨의 수가 가장 많고, 석주 이상룡의 고성 이씨, 퇴계 이황의 진성 이씨, 학봉 김성일의 의성 김씨, 서애 류성룡의 하회 류씨가 그 뒤를 이으며, 전주 유씨, 봉화 금씨, 예안 이씨도 이 대열에 속한다. 이 중에서 김성일의 후손과 류성룡의 후손은 영남 유림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던 퇴계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오랫동안 경쟁해 왔다. 한편 안동에는 퇴계의 도산서원, 류성룡의 병산서원, 김성일의 임천서원이 있어 여기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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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전판 전전, 의성 김씨 종손 김용환
종택 네 번 날린 판돈 빼돌려 군자금
신식 교육 협동학교 세운 김대락
나라 잃자 온가족 이끌고 만주 이주
신흥무관학교 주축, 협동학교 출신
유공자 27명 집성촌에 기념관 건립
」
안동 내앞마을에 있는 김대락의 백하구려. 건물 왼편에 협동학교 교사로 쓰인 사랑채가 있었다. [사진 김정탁]
그런데 김성일은 선조 때 일본에 수신사로 갔다가 일본이 곧 쳐들어올 것 같은 정형(情形)을 보지 못했다고 잘못 보고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에 『연려실기술』은 “황윤길·허성 같은 우둔한 사람도 적의 정세를 알았거늘 명민하다는 김성일이 어찌 이를 모를 리 있는가. 답서에 명나라를 침범한다는 말이 있는데 한마디 항의도 못 하고 답서를 받아와 벌 받을까 두려워 이런 말을 꾸민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짐을 평가해 보라’는 선조의 하명에 성군 요순도 될 수 있고 폭군 걸주도 될 수 있다고 대답할 만큼 그는 담대했다.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 초유사로 공을 세우고, 곽재우도 그의 도움을 받아서 의병장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새벽에 노름판 덮쳐 판돈 챙겨
그렇더라도 김성일의 잘못된 보고는 옥의 티인데 300년의 세월이 흘러서 조선이 망할 때 그의 후손들이 보여준 의로움은 이를 상쇄할 만하다. 먼저 학봉의 13대 종손인 김용환(金龍煥·1887~1946)은 파락호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은 난봉꾼인데 실제로는 교묘하게 노름돈으로 독립 자금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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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파락호 소리를 들은 건 노름판을 찾아다니면서 초저녁부터 노름하다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다 걸었는데 이때쯤이면 그의 수하들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죄다 쓸어가서다. 이들은 만주로 독립 자금을 몰래 보낸 사람들이었는데 노름꾼들은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 수백 년 내려오던 종가의 재산 전답 18만 평(현재 시가 약 400억원)은 남의 손에 넘어갔고, 종택도 날렸다. 문중에선 가문의 체통 때문에 돈을 갹출해서 종택을 세 번이나 되샀어도 김용환은 또다시 종택을 노름 밑천으로 삼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내가 아이 낳은 줄도 모르고 노름판을 쏘다니다 아내 손을 잡으면서 “미안하오. 이제 깊이 뉘우쳤소. 앞으로 달라지겠소”라고 약속했어도 땅문서를 들고 노름판을 어김없이 다시 찾았다. 문중에선 “집안을 망해 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찼어도 문중의 구심.이라 어쩔 수 없었다.
김용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이런 식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댄 사실이 사후에야 밝혀졌다. 그간 노름판에서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이 모두 만주의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내져서다. 그러니 그는 독립군 군자금을 몰래 마련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위장된 삶을 살면서 가족에게도 함구했다. 그를 도와 노름판을 덮친 한 독립군 동지는 그의 임종 무렵 “이제는 독립군에게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자 “선비의 후예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끝까지 비밀을 지켜달라”라는 말을 남기고서 눈을 감았다.
그가 이런 애국적인 행동을 보일 수 있었던 건 어렸을 때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이 사촌인 의병대장 김회락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일경에 의해 포박당한 채 마당에 무릎 꿇은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다. 서산은 학봉의 종손이자 퇴계 학통의 정맥을 이어받은 안동 유림의 큰 스승이라 이 일은 학봉 일가뿐 아니라 영남 유림에게도 그들의 체통과 자존심을 뭉갠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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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일로 김용환은 의성 김씨 종손임에도 항일운동의 뜻을 가슴에 굳게 품었는데 비밀 유지를 위해 망나니 행세를 하면서 노름판을 전전하는 파락호로 자신을 위장했다.
학봉 김성일 종택. 이 집을 김용환이 노름판에서 네 차례나 날렸다. [사진 김정탁]
김성일 종택 부근에 있는 학봉역사문화공원. [사진 김정탁]
내앞마을 앞을 흐르는 반변천. [사진 김정탁]
안동 혁신 유림의 출발지
서산 김흥락도 일찍이 항일운동에 투신한 애국자다. 그는 단발령으로 촉발된 을미의병 투쟁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후에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도 스승인 그를 쫓아 의병 활동에 참여했다. 그런데 독립운동의 방향이 교육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자 그는 안동에서 근대식 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이때 학교 교사를 제공한 사람은 그의 일가이자 이상룡의 처남인 백하구려(白下舊廬) 주인 김대락(金大洛)이다. 그는 1907년 사랑채를 확장해 이 지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열었는데 이 학교는 1년 후 유인식(柳寅植)의 집으로 넓혔다.
협동학교는 항일 무장 투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식 교육을 통해서 나라를 되찾겠다는 장기적 안목에서 세워졌다. 이에 따라 주자학 일변도의 사변 철학을 거부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실천 교육에 초.을 맞추었다. 그리고 여기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유학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켜 안동 혁신 유림의 주축을 이루었으니 백하구려는 안동 혁신 유림의 출발지라 할 수 있다.
안동 혁신 유림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만주로 이주하는 데도 앞장섰다. 이때 가장 먼저 총대를 멘 사람이 백하구려의 주인 김대락이다. 그는 노비를 모두 해방하고 선영을 지킬 몇 사람만 남긴 뒤 아들 김형식, 여동생 김우락과 그녀의 남편 이상룡,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워 나중에 ‘만주벌 호랑이’라고 불린 조카 일송 김동삼(金東三) 등 온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때 15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만주로 갔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백하구려가 있는 내앞마을 사람들이라 내앞마을은 텅텅 비다시피 했다. 이때 김대락은 독립 자금 마련을 위해 전 재산은 물론이고, 백하구려 사랑채까지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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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한 시기에 한양의 이석영·이회영 여섯 형제와 그 일가도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서간도로 지금의 길림성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다. 이들은 여기에 경학사(耕學社)라는 한인 자치 모임을 결성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1912년 2월 초에는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해서 6월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는데 이때 교장은 이상룡, 군사교관 책임자는 김동삼, 일반행정 책임자는 김형식이었다. 그러니 신흥무관학교의 주축 멤버는 모두 안동 협동학교 출신들이었다. 김대락은 이듬해 2월 삼원포로 돌아온 후 여기에도 신흥무관학교 분교를 설립했는데 5년 후 노환으로 죽었다.
내앞마을 앞 협동학교 자리에 세워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사진 김정탁]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공원. 공 모양의 돌에 독립투사 명단을 새겼다. [사진 김정탁]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표지석. [사진 김정탁]
김용환 장모도 고문 사실 숨겨
의성 김씨 일가 중에 김대락과 김용환만 자신의 공을 묻고 죽은 게 아니다. 김용환의 장모 김락(金洛)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의 남편은 이중업이고, 아들은 이동흠인데 이들도 일찍이 항일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또 그녀의 시아버지 향산 이만도는 국권이 박탈되자 분을 이기지 못해 단식 끝에 순국했다. 그래서 이 집은 늘 일경의 감시 속에 있었는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수비대에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 그녀를 쥐어짜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두 눈이 멀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 10년 후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어도 이런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다가 2001년 뒤늦게 독립 유공자 명단에 들었다.
안동 출신 독립 유공자는 350명으로 전국에서 시군 단위로 볼 때 절대적으로 가장 많다. 이 중에서 김흥락의 제자가 60여 명이고, 의성 김씨 집안 출신만도 27명인데 이중 학봉 직계 손은 17명이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의성 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 앞에 세워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내앞마을은 구한말 신학문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한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이다. 게다가 백하구려의 협동학교는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가 되었으니 김대락이 세우고 유인식이 확장한 협동학교는 만주 항일운동의 모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김정탁 노장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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