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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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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6-11-0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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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고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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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는 평을 듣는 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는 1909년 12월22일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의 처단 미수 사건 직후 뉴욕타임스(12월23일자)에 “이완용은 1886년 즈음 나의 제자였다”고 술회했다. 이기환 제공 “이완용은 나의 첫 제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만….” 1909년 12월23일자 뉴욕타임스는 ‘이완용은 일제의 도구(YI A JAPANESE TOOL)’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랬다. 이완용(1858~1926)보다 5살이나 어렸지만 분명 이완용을 가르친 스승이 맞았다. 인터뷰 전날(22일) 매국노 이완용이 서울에서 22살 청년 이재명(1887~1910)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자 뉴욕타임스가 헐버트의 설명을 긴급으로 딴 것이었다. 신문은 우선 “헐버트는 한국에서 공직 및 반 공직에서 오랜 경험을 쌓았고 최근 변장한 채 한국을 탈출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헐버트는 이 기사에서 대한제국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을 “나의 제자였다”고 소개했다. “이완용은 나의 제자였다” “이완용은 1886년부터 매우 친밀하게 알고 지내온 사람이다. 내가 조선 정부의 학무아문(교육부) 소속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첫 제자 중 한 명이었다…내가 맡았던 첫 학급의 학생 40명 중에서 단연 뛰어난 총명을 지닌 학생이었다.” 헐버트는 “이완용은 영어를 매우 빠르게 습득하여 불과 1년 만에 상당한 수준으로 유창하게 대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면서 “매우 부지런하고 목적의식이 분명하여 그의 앞날에 훌륭한 미래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헐버트의 다음 평가가 의미심장하다. 헐버트는 ‘1886년 설립된 왕립 육영공원의 교사로 시절 5살 연상의 제자 이완용을 가르쳤다. 헐버트는 “이완용은 매우 총명하여 총명하고 부지런해서 1년 만에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전했다. 이기환 제공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이완용은 ‘가장 높은 가격을 쳐주는 쪽에 자기 자신을 팔려는 욕망’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이완용을 ‘한국 정부의 가장 높은 직책’(총리대신)으로 올려 이용하고 있다.” 헐버트는 “통감부의 일본인들이 역시 이완용을 활용해 1907년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헐버트는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고…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거나 절멸시키기로 결심했다”면서 “이 。은 미국인들이 아주 확실하게 알아두어도 좋다”고 했다. 헐버트는 “그러나 이완용은 ‘가장 높은 가격을 쳐주는 쪽에 자기 자신을 팔려는 욕망’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일본은 이완용을 ‘총리대신’으로 올려 이용했고, 결국 1907년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고 전했다. 이기환 제공 대인배의 나라 미국인데… 그렇다면 이들 스승과 제자는 어디서 가르치고 배웠단 말인가. 마침 얼마 전 설립 140주년이 된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1886년 9월 설립), 바로 그곳이었다. 시간을 1882년 5월22일로 돌려보자. 조선은 서구열강 중 처음으로 미국과 통상수호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큰 문제가 있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이 없었다. 전적으로 청나라인 마건충(馬建忠·1845~1899)에게 조약의 통역을 맡겼다. 그렇게 맺은 조약의 제12조가 ‘조약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5년 후 양국 관민이 각각 언어에 익숙하게 되었을 때…재교섭한다’는 것이었다. 매력적인 조항이 또 하나 들어 있었다. 모바일 야마토오락실게임 헐버트는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고…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거나 절멸시키기로 결심했다”면서 “이 。은 미국인들이 아주 확실하게 알아두어도 좋다”고 강조했다. 이기환 제공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제1조)는 조항이었다. 조선이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미국이 ‘짜잔!’하고 나타나 도와준다는 조항이었다. 그러니 조선에 미국은 ‘대인배의 나라’이자 아름다울 ‘미(美)’자 미국이었다. 1883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절단(보빙사) 부대사 홍영식(1855~1884)이 고종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기계의 제조 및 배·차·우편 전보 등이 급선무…교육이 가장 중요한데 미국의 교육 방법을 본받아 인재를 양성해서 백방으로 대응한다면 어려움이 없을 것….”(홍영식의 ‘복명서’) 헐버트와 이완용은 1886년 건립된 왕립 육영공원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육영공원은 1883년 수교 1주년 기념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절단(보빙사)이 고종에게 미국식 교육기관의 설립을 촉구하는 보고서를 올림으로써 추진됐다. 이기환 제공 원어민 교사 3명 초빙 고종은 즉각 미국식 근대 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했다. 왕립 육영공원이다. 고종은 조선 주재 미국공사를 통해 원어민 교사 3명을 초빙했다. 호머 헐버트와 델젤 벙커(1853~1932), 조지 길모어(1858~?) 등이다. 셋 다 미국의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교에 재학 중인 청년들이었다. 1886년 7월4일 입국한 원어민 교사 3명은 육영공원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들이 마련한 <육영공원 절목(운용규칙)>에 따르면 육영공원은 단순히 영어만을 가르치는 어학교가 아니었다. 각국의 지리 및 역사, 정치, 그리고 수학과 자연과학 등을 가르치는 근대 종합교육기관을 지향했다. 모집 학생은 좌원과 우원으로 나눴다. 좌원은 현직 관리 중 유능한 10명, 우원은 15~20세에 이르는 총명한 선비 20명을 각각 선발하도록 했다.(<고종실록> 1886년 8월1일) 그러나 개원 첫해(1886)엔 좌원 14명, 우원 21명 총 35명이 입학했다. 고종은 미국식 근대 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했다. 고종은 조선주재 미국공사를 통해 원어민 교사 3명을 초빙했다. 셋 다 미국의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교에 재학 중인 청년들이었다. 이기환 제공 어색한 악수 하기 1886년 9월16일 학생 35명 중 30명이 출석한 가운데 첫 수업(오리엔테이션)이 열렸다. 이날 외국인 교사의 눈에는 “육영학원 관리는 물론이고 학생들까지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수업에 출석했다”(길모어)는 게 이채로웠다. 1886년 9월16일 교사와 학교 관계자, 그리고 학생들의 상견례 모습을 다룬 뉴욕트리뷴의 기사(‘조선의 학교선생님들’)가 재미있다. “…미국 대학에서도 이보다 더 깨끗하고 밝으며 신사적인 청년 무리를 선발하기 어려울 것이다. 학생들의 얼굴에는 명민한 지성이 나타나 있었고, 절차에 임하는 열렬한 시선과 숨죽인 관심 속에서 강렬한 열정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악수로 서양식 예절을 배운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뉴욕트리뷴은 “학생들은 어설픈 조선어로 인사말을 시도하는 교사들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교사들도 생전 처음으로 ‘악수’를 하기 위해 두려움과 떨림으로 손을 내미는 학생들을 보며 참지 못하고 웃었다.”고 전했다. 1886년 7월 3명의 미국인 교사가 입국하자 육영공원의 운영지침에 마련되었다. 무료충전릴게임 관리 10명, 15~20세 유생 20명 등이 입학한 육영공원에서는 영어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지리 및 역사, 정치, 수학과 자연과학 등을 가르쳤다. 이기환 제공 정규 수업은 9월23일 시작되었다. 교사 헐버트가 어머니에게 쓴 9월24일자 편지를 보자. “수업 둘째날(24일)…오전 첫 시간에 출석부를 불렀습니다. 제 발음이 매우 우스꽝스러웠을 겁니다…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 land, head, man, arm, yes, no, face, black-board…teacher, mouth, nose, eye, one, two, three, see, hear, I, you, am…등을 가르쳤습니다.” 헐버트도 “학생들은 아주 유쾌한 사람들이고,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어느 때고 거침없이 웃음을 터뜨린다”고 전했다. “일전에 그들 중 몇 명을 집으로 초대해 제 타자기와 바이올린 등을 보여주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 친구들은 매우 상냥하고 친근하며, 그들과 깊은 교우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1886년 9월16일 육영공원 첫 수업을 묘사한 뉴욕트리뷴 1886년 11월28일자. “…미국 대학에서도 이보다 더 깨끗하고 밝으며 신사적인 청년 무리를 선발하기 어려울 것이다. 학생들의 얼굴에는 명민한 지성이 나타나 있었고, 절차에 임하는 열렬한 시선과 숨죽인 관심 속에서 강렬한 열정이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썼다. 이기환 제공 8개월 만에 3000단어 습득 교사는 한국어를, 학생들은 영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은 100% 영어로 진행됐다. 그럼에도 원어민 교사들은 ‘영어’ 뿐 아니라 수학과 자연과학 같은 다른 전문과목까지 가르쳤다. 단 8개월 만에 학생들은 3000단어를 외웠다. 한껏 고무된 고종은 “방학 때도 공부에 소홀함이 없게 5일 간격으로 시험을 치르라”(고종실록 1887년 5월2일)고 명했다. 헐버트가 미국의 가족들에게 쓴 일련의 편지에 학생들의 일취월장이 담겨있다. “학생들은 영민하고 민첩하며 빨리 배우려고 집중합니다.”(1886년 9월24일 어머니에게) 뉴욕트리뷴은 “교사와 학생들이 서양식 인사인 악수를 나누며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고 전했다. 이기환 제공 “학생들은 오늘 ‘Six men will come to the house tomorrow’ 같은 문장을 배웠다.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10월2일 누이에게) “단어 200개와 다양한 표현 및 관용구들을 가르쳤고, 지금은 동사를…그들은 잘 습득하고 있으며 정말 열성적이다.”(10월17일 누이에게) “두 번째 월례시험에서…시험지의 다수는 거의 완벽했습니다…학생들은 한 달 전보다 훨씬 빨리 수업에 참석하고 충분히 즐기고 있는 듯…뒤에 처진 학생 몇 명을 따로 뽑아 가르쳤는데 이번에 잘 해냈습니다.”(11월21일 어머니에게) “학교 일은 번창…수학, 지리, 문법의 몇 가지 분야를 시작…학생들이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12월9일 아버지에게) 교사들은 조선 학생들에게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 land, head, man, arm, yes, no, face…등부터 가르쳤다. 헐버트 교사가 미국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당시의 수업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학생들이 영민하고 민첩하며 빨리 배우려고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기환 제공 9년6개월만에 문 닫았지만… 이렇듯 육영공원의 미래는 장밋빛 같았다. 하지만 육영공원은 설립 9년 6개월만인 1895년(고종 22) 문을 닫는다. 이유가 뭘까. 모바일 바다이야기하는방법 우선 당시 조선 정부의 재정형편 상 학교 운영의 재원을 제때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교사들의 봉급이 자주 체납됐다. 또 하나 수업시간을 줄인 보수 성향 관리들의 방해공작이 만만치 않았다. 육영공원은 갈수록 교육기관의 역할을 잃어갔다. 길모어(1888)-헐버트(1891)-벙커(1894) 등 교사들도 자의와 타의로 사임했다. 이 때문에 ‘육영공원=실패한 근대식 교육정책’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육영공원의 이른바 영어몰입식 수업은 이어지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영어교육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헐버트는 “학생들이 너무도 빨리 열성적으로 학습하고 있다”면서 “시험성적도 완벽하다”고 극찬했다. 헐버트는 옆집 아이들이 불렀다는 아리랑의 악보를 옮겨 적어 보내기도 했다. 이기환 제공 이완용의 처세술 육영공원이 배출한 졸업생은 112명에 이른다. 그중 존재해서는 안 될 인물이 있었다. 훗날 매국노가 된 이완용이다. 이완용의 일대기(<일당기사>·1927)에 따르면 1882년 과거에 급제한 이완용은 1886년 종6품 부사과 신분으로 육영공원 좌원에 입학한다. 이완용은 훗날 조카(김명수)에게 자신의 카멜레온식 변신을 자랑삼아 떠벌인다. “25살에 조선인의 목표인 과거(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미국과의 교제가 。。 긴요해졌기에 신설된 육영공원(좌원)에 들어가 미국에 가게 되었다. 이후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당이라는 말을 들었다. 일러전쟁 후 지금은 일본파라는 칭호를 얻었다. 때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를 뿐이다…” 육영공원이 배출한 졸업생은 112명에 이른다. 그 중 존재해서는 안 될 학생이 훗날 매국노가 된 이완용이다. 이기환 제공 이완용은 “천도(天道)는 물론 인간사(人事)에도 변역(變易·변화의 이치를 안다는 뜻)이 있다”면서 “실리를 잃으면 성취할 수 없을 것”이라 강변했다. 조선인으로 관직을 얻어 친미파-친러파-친일파로 변신한 이유는 인간사 변화를 터득한 덕분이라 자화자찬한 것이다. 육영공원에서 신학문과 신문명을 접한 이완용은 졸업 후(1887년 7월20일) 미국 주재 조선 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임명되었다. 육영공원 수업이 출세의 지렛대가 된 것이다. 그랬던 이완용의 종착역은 한마디로 ‘매국’이었다. 이완용은 자신이 친미파-친러파-친일파로 변신한 것은 인간사 변화를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이기환 제공 육영공원 출신 독립투사 그러나 육영학원 졸업자 가운데는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친 이들도 있었다. 예컨대 교육가이면서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선 심계택 선생(1861~1919)을 꼽을 수 있다. 선생은 1919년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수많은 고문을 받았다. 결국 식음을 전폐하다가 순국했다.(1919년 5월10일) 이한응 선생(1874~1905)은 15세 어린 나이에 육영공원(우원)에 입학했다. 1904년 런던주재 한국공사관 대리공사가 된 이한응은 한국의 독립과 주권 영토 보존을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보장을 삭제한 영·일 동맹이 추진되자 절망한 선생은 1905년 5월12일 27세 젊은 나이에 자결 순국했다. 1889년 21살 때 육영공원에 입학한 이세영 선생(1869~1941)은 졸업 후 곧바로 의병운동에 투신했다. 1913년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임시정부 참모차장-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완용은 육영공원 졸업 후(1887년 7월20일) 미국 주재 조선 공사관 참찬관으로 임명된다. 이완용은 육영공원을 출세의 지렛대로 삼았다. 1905년 11월17~18일 을사늑약 당시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매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완용의 종착역은 ‘매국’이었던 것이다 바다이야기 비밀코드 . 이기환 제공 편지에 담은 한국 사랑 육영공원을 빛낸 가장 큰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교사인 호머 헐버트라 할 수 있다. 헐버트는 1919년 8월30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위원회 연설에서 “나는 절반 한국인입니다”라고 선언했다. 과연 헐버트는 1886년 7월 서울에 도착한 이후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게 된 분이었다. 그가 한국에서 고향의 부모 형제 등에게 보낸 지극히 사적인 편지에서 ‘한국과 한국인 사랑’을 듬뿍 담았다. “저는 서울의 산(인왕산 혹은 북악산인듯)이 주는 아름다운 경치 몇 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상을 따라 담(성벽)이 이어져 있습니다. 제가 여태 봐온 최고의 경치를 볼 수 있습니다.”(1886년 7월10일 어머니에게) “한국의 광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풍경과 같습니다…”(8월14일 어머니에게) 반면 육영공원 교사 호머 헐버트는 1919년 8월30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위원회 연설에서 “나는 ‘절반 한국인’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이기환 제공 헐버트는 요즘의 외국인 관광객처럼 도심과 산이 어우러진 광경에 매료된 듯하다. “학생들은 매우 유쾌하고,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어느 때고 거침없이 웃음을 터뜨립니다.”(9월24일 어머니에게) 그러면서 헐버트는 한국 생활의 만족감을 한없이 드러냈다. “…우리는 참으로 훌륭한 음식들을 먹고 있습니다. 제가 고향에서 익숙했던 것 이상…제가 필요로 하는 모든 편의를 누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커튼을 달았다. 바느질은 조선 여성이 했는데 참으로 솜씨가 좋다.”(9월말 10월초 누이에게) 미혼이었던 헐버트는 미래의 아내가 될 여성(메이)와 한국 땅에서 살기를 원하면서 “미리 데려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9월24일 어머니에게) 헐버트는 고향의 부모 형제 등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울 근처의 산을 사랑해서 마치 스코틀랜드의 풍치에 견줄 수 있을 만큼 한 폭의 그림같다고 했다. 헐버트는 “이곳 날씨는 완벽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을 본 적이 없다”고 극찬했다. 이기환 제공 이런 아름다운 노을을… 특히 10월17일 누이에게 보낸 편지는 구구절절 얼마나 한국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내가 얼마나 이곳에 잘 적응하는지 네가 보면 놀랄 거다. 내가 원하는 모든 설비를 다 갖추고 있단다.” “풍경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이곳의 경치는 옛날의 흔적이 있다. 네가 이곳에 있다면 고대 국가에 있는 느낌이 들게 될 거야…” “가장 생동감 넘치는 계절이다. 날씨는 완벽하고 길은 아주 멋지다…이렇게 아름다운 노을을 본 적이 없다. 청색과 붉은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그 빛깔은 거의 형언할 수 없다.” 이 무렵 헐버트는 우연히 ‘아리랑’을 배워 악보에 옮겨적는다. “옆집 꼬마 두 명이 몇 번이나 부른 짧은 곡조는 내가 외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라 은리손 아라리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구나.” 한국과 한국인에게 매료된 헐버트는 당연히 재계약을 원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재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조선 정부가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떠나면서 “…분에 넘치는 따뜻한 사랑을 받았다. 언젠가 조선에 다시 오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기환 제공 이렇듯 한국과 한국인에게 매료된 헐버트는 당연히 재계약을 원했다.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고 싶습니다. 저 자신이 아주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 조선이 저를 떠나도록 놔둘 수 없게 할 것입니다. 제가 맡은 문법 관련 작업은 물론 역사, 지리학, 정치경제학, 국제법 같은 다양한 작품들을 계속 조선어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바다이야기배당 .”(1890년 1월27일 부모에게) 실제로 헐버트는 “한국에 3년 더 머물 것 같고, 혹시 다른 일을 10년간 더 할 지도 모른다”면서 “이 민족에게 지속해서 가치 있는 무언가 완성해주고 싶다”고 다짐했다.(1890년 11~12월과 12월31일) 하지만 기대했던 재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조선 정부가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떠나면서 나쁜 말을 더하지 않았다. “좋은 친구들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 아쉽지만…우린 분에 넘치는 따뜻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언젠가 조선에 다시 오게 될지 모르겠습니다.”(1891년 12월13일 부모에게) 1907년 일본의 박해를 받아 귀국한 후에도 평생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헐버트는 “한국민은 성질이 참고 잠잠하나 핍박이 심해지면 반드시 죽기를 결단하여 싸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나의 마지막 핏방울까지 앞으로 30년 더 한국을 위하여 일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헐버트는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라고 기뻐했다. 이기환 제공 나는 “반은 한국인입니다.” 그랬다. 헐버트와 조선(한국)의 인연은 더욱 각별해졌다. 이후 헐버트는 세 번이나 고종의 비밀특사가 됐다. 1905년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재임 1901~1909)에게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는 임무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국가원수들을 방문하여 일제의 침략주의를 고발하며 도움을 청하는 임무를 잇달아 맡았다. 또 1909년 상해(上海) 은행에 예치한 고종의 내탕금을 찾아오라는 특명도 받았다. 1907년 일본의 박해를 받아 귀국한 후에도 38년 동안 미국 내는 물론 전 세계를 돌며 강연과 기고, 집회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헐버트는 “한국민은 성질이 참고 잠잠하나 핍박이 심해지면 반드시 죽기를 결단하여 싸울 것”(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27일)이라고 단언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2월5일 5차 심문에서 “헐버트는 한국인이라면 절대 잊어서는 안될 인물”이라 했다. 헐버트는 안중근 의사가 인증한 미국인 독립투사였다. 이기환 제공 1920년 3월1일 미주리주 캔자스에서 3·1운동 1주년 기념 연설에서 헐버트는 “나는 한국을 위하여 지난 30년 동안 사역했는데…나의 마지막 핏방울까지 앞으로 30년 더 한국을 위하여 일할 것이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헐버트는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라고 기뻐했다. 새삼 안중근 의사가 문초를 받으며 진한 내용이 귓전을 때린다. “헐버트는 한국인이라면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1905년 12월5일) 안중근 의사가 인증한 ‘반(半) 한국인 독립투사’ 헐버트의 삶이다. 정리하면 육영공원이 결과적으로 ‘이완용’이라는 괴물을 배출했으니 ‘대실패’라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위안으로 삼는다. 육영공원이 없었다면 어떻게 ‘헐버트’라는 위인이 한국과 인연을 맺었겠는가. <참고자료> 최보영, ‘육영공원 교사 헐버트의 독립운동과 학원(學員)의 사회 진출’, <역사민속학 제52호>, 한국역사민속학회, 2017 김원모, ‘견미사절 홍영식 복명 문답기’, <사학지>, 단국대 사학회, 1995 김경민, ‘육영공원과 헐버트’, <고봉논집> 45집, 경희대학원, 2009 우현정, ‘고종대(1863~1907) 관립 외국어 교육기관 출신자 연구’, 충남대 박사논문, 2020 유방란, ‘육영공원 소고’, <교육사학연구> 4, 서울대 교육사학회, 1992 강세영, ‘헐버트의 교육 관련 활동 연구-그의 서신 중심으로’, 한국교원대 석사논문, 2013 홍완표, ‘최초의 관립 육영공원의 설립과 교육’, <논문집>, 안성농업전문대, 1985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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