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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영의 읽고사니즘 ‘2030’으로 묶이는 30대 후반이지만 87년생이다. 디지털 네이티브는 당연히 아니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인터넷을 해본 적이 없다. 심심할 때면 책을 봤다. 당연히 머릿속에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 시절 여름밤, 티브이(TV)에서 ‘전설의 고향’이 끝나도 잠이 오지 않으면 같이 이불을 뒤집어쓴 언니는 내게 ‘재밌는 얘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못 이기는 척 읽었던 책들의 줄거리를 기억나는 대로 들려주었다. “옛날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살았는데….” 이야기를 멋대로 늘리고 줄이며 한참 떠들주식투자성공기
다 보면 깔깔대던 언니의 웃음소리가 점점 잦아들다 조용해졌다. 그러면 나도 내가 들려주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듯 잠이 들었다. 그때 한참 읽던 책들은 고전소설이 많았다. 우리 자매가 중학교에 가면 읽히겠다고 어머니가 일찌감치 들여놓은 누런 표지의 고전소설 전집 덕분이었다. ‘콩쥐팥쥐’ ‘박씨전’ ‘춘향전’ ‘홍길동전’처럼 잘 알려진 작품은 물론 ‘임경업전’체리마스터
‘홍계월전’ ‘장국진전’ 같은 작자 미상의 영웅소설과 ‘숙영낭자전’ ‘운영전’ 같은 연애소설도 있었다. 나의 최애는 영웅 전기소설이었다. 국경지대의 오랑캐들이 천자의 자리를 위협하는 난세,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 날 한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천신만고를 겪으며 무예와 학문을 익히고, 세상에 나아가 운명의 짝을 만나 슬기롭게 고난을 헤쳐가다 새만금수혜주
마침내 천자를 구해 영웅이 된다. 영웅이 된 주인공은 행복한 여생을 살다 신선이 되어 하늘로 돌아간다. 판에 박힌 듯한 희로애락과 권선징악의 스토리를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어머니에게 들었던 꾸지람이나 장애를 가진 동생을 돌보며 느꼈던 힘든 마음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들은 나의 마르지 않는 ‘재밌는 얘기’의 원천이었다. 이 이야기들은 주식시작
우리 자매의 베갯머리와 내 마음속에서 천천히 변형되고 한데 섞여 자연스레 내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 나이를 먹으며 다양한 문학의 세계를 알게 되었지만, 아직도 내겐 다른 어떤 문체와 형식보다 옛날이야기를 글자로 옮겨 적은 듯한 전기 형식의 작품이 가장 편안하다. 그래서일까. 쏟아지는 정보와 날 선 논쟁에 지친 어느 날, 세상을 잊을 수 있는 ‘재밌는 얘기’릴게임용의눈
가 읽고 싶어 책장을 훑어보다 몇년 전 사둔 위화의 ‘원청’을 꺼내 들었다. 애니고 재학 시절 ‘허삼관 매혈기’를 무척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었다. 중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위화가 쓴 첫번째 전기소설이 어떤 내용일지 기대가 됐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전기소설답게 ‘난세’다. 다만 이 난세는 천자가 오랑캐의 침략을 받던 난세가 아니라 청말민초, 즉 중국 청나라 말기에서 민국 초기까지의 구체적인 근현대사의 시간이다. 이야기의 주인공도 별이 떨어져 사람이 된 아이가 아니라 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진 북방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평범한 남자아이 린샹푸다. 위화가 그려내는 청말민초의 영웅 린샹푸의 길은 흥미롭게도 천자를 구하는 자미성의 여정이 아니라 잃어버린 아내를 찾아 북에서 남으로 중국을 종단하는 방황의 길이다. 주인공 린샹푸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지만 꿋꿋하고 착실한 20대 농사꾼으로 살아간다. 고민이 있다면 혼기를 조금 놓친 것. 그러던 어느 날, ‘말이 어찌나 빠른지 글자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어투로 대화하는 낯선 오누이가 그의 집을 찾아와 하루 묵기를 청한다. 린샹푸는 여동생 샤오메이에게 한눈에 반하고, 다음날 오빠는 동생을 잠시 맡겨두고 길을 떠난다. 오빠를 기다린 지 몇달, 린샹푸와 샤오메이는 연인이 되고 혼인을 한다. 혼수라며 달랑 자수 놓인 두건 석장을 내놓는 샤오메이에게 린샹푸는 선조부터 대대로 모아온 전 재산인 금괴와 땅문서를 조심스레 보여준다. 며칠 후, 샤오메이는 그 절반을 가지고 홀연히 사라진다. 린샹푸는 큰 시름에 빠지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아예 누구도 훔쳐 갈 수 없도록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해 목공을 익힌다. 놀랍게도 샤오메이는 몇달 만에 돌아온다. 배 속에 린샹푸의 아이를 가진 채. 그러나 금괴의 행방에는 굳게 입을 닫는다. 린샹푸는 괴로워하면서도 샤오메이를 다시 받아주며 말한다. “당신이 또 말도 없이 떠나면 내가 찾으러 갈 거예요. 아이를 안고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당신을 찾을 거예요.” 아이를 낳은 샤오메이는 결국 다시 사라지고, 린샹푸는 정말로 집안 살림을 정리해 집사에게 맡긴 뒤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아내를 찾으러 떠난다. 오누이를 처음 만난 날, 그들은 자신의 고향을 남쪽 물의 고장, ‘원청’이라고 했다. 린샹푸는 오로지 원청이라는 이름과 그곳에 대한 오누이의 묘사에 기대어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지만 그 누구도 원청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누이와 똑같은 빠른 어투를 가진 뱃사공을 만난 린샹푸가 그의 고향을 묻자 “시진”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본능적으로 시진이 원청이라고 생각한 린샹푸는 시진에 터를 잡고 아내를 찾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시진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내가 아니라 수많은 타인들과 자연재해, 시대의 격랑, 그리고 그의 죽음이다. ‘원청’은 내가 어린 시절 도피처로 삼았던 권선징악의 도식적 영웅 전기는 아니다. 그런 얘기라면 제목이 ‘원청’이 아니라 ‘린샹푸전’이었을 것이다. ‘원청’의 진짜 주인공은 사람의 마음이다. ‘원청’의 감동은 비범한 주인공의 활약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크고 작은 공명으로 만들어진다. 아내를 찾아 헤매며 갓난아이를 먹이기 위해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집마다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엽전 한닢을 내밀며 젖동냥을 하는 린샹푸의 모습. 그 모습에 말없이 곁을 내주는 사람들. 그렇게 백집도 넘는 집의 젖동냥으로 자란 아이의 이름을 ‘바이자’(백가)라고 지은 린샹푸의 마음. 며칠째 폭설이 내리는 밖을 헤매다 겨우 젖동냥을 구하러 들어온 린샹푸 부녀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말없이 죽 한 그릇을 내준 낯선 부부의 마음. 이런 시기에 가난한 집의 죽 한 그릇은 목숨을 내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기에 차마 그 죽을 먹을 수 없어 그 집 아들을 가만히 안고 떠먹여주는 린샹푸의 마음. 그렇게 이어지는 마음과 마음들. ‘원청’은 소중한 것을 잃고 잃은 것을 찾으려 애쓰며 난세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마음의 공명에 관한 전기다. 이 공명의 전기를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세상에 지친 마음이 잦아들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인생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영원히 닿을 수 없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내 마음속의 원청에 대해서. 이제 마흔이 된 언니는 더 이상 내게 재밌는 얘기를 들려달라고 하지 않지만, 언젠가 다시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준비가 되어 있다. “옛날 옛날에, 아니 그렇게 멀지는 않은 옛날에 어떤 남자가 살았는데….” 장혜영 전 국회의원
원청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푸른숲(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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