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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비가 얌전히 오면 그나마 괜찮지만, 비바람 불 때는 조금 힘듭니다. 주요 대선 주자들은 이쪽에 신경을 쓸 만큼 경황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관심이 약한 게 느껴지죠. 고공농성 중인 세 곳(한국옵티칼하이테크·세종호텔·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모두 정치권의 노력 없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곳들인데, 대출한도조회 응원과 연대를 해주시는 시민분들이 저희에게는 희망입니다."
해고노동자 고진수(민주노총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씨의 목소리에는 착잡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20년간 몸담은 일터인 서울 중구 세종호텔 앞 10m 높이의 철제 구조물에 올라 86일째(9일 기준) 농성 중이다.
이날 한국일보와 전화 인터뷰를 한 고 지부 회사원 장은 고공농성 중인 또 다른 노동자 2명을 걱정했다.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공장 옥상에 오른 지 488일이 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 박정혜씨와 원청 한화오션에 교섭을 요구하며 56일째 30m 높이 철탑에서 시위 중인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거통고) 조선하청지회장이다.
'우리 삶을 바꾸는 노동자 공동행동' 등 시민사회와 시민들은 여자 직장인 백팩 양당 대선 주자 등 정치권의 관심을 촉구하며 9일 저녁 서울 중구 한화 본사 앞에서 최소 200여 개 텐트를 치고 1박 2일 노숙농성을 벌인다. 이들은 세 사업장에 대한 조속한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고공농성 해결 없이 민주주의도, 노동 존중도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김형수 지회장은 이날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비바람이 부는데 (연대하는 시민들 남양주별내공공임대 이) 텐트를 친다 해서, '그냥 안 했으면 좋겠다' 싶고 미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라며 "대선 후보들의 최근 행보를 보면 답답한 심정"이라며 말을 아꼈다.
250명 넘던 세종호텔 정규직, 이제 20여 명
서울 중구 명동의 세종호텔에서 광주 중기청 20년간 일한 고진수 지부장은 올해 2월 13일부터 세종호텔 앞 10여m 높이 지하차도 진입차단시설 철제 구조물 위에서 해고자 복직과 비정규직 확대 반대를 외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가로폭 1m가 채 안 되는 농성장에 숙식을 위한 물건들이 놓여있는 모습. 맨 오른쪽 사진은 "몸 상하지 마세요" "얼른 우리 땅에서 만나요" 등 그에게 보내는 응원 메시지들이 농성장 한쪽에 붙어있는 모습. 고진수 지부장 제공
세종호텔 일식 요리사였던 고 지부장은 2021년 12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경영 악화 등을 이유로 정리해고된 노동자 12명 중 한 명이다. 이 중 6명이 복직을 요구하며 3년 넘도록 투쟁하고 있다.
노조와 시민사회는 세종호텔이 충분히 고용을 유지할 여력이 됐음에도, '노조 탄압' 차원에서 민주노총 조합원 12명에 대해서만 부당해고를 한 것이라고 본다.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고용을 유지하는 사업장에 인건비를 90% 지원하는 정책을 폈는데, 노조가 '나머지 10% 몫은 노동자가 감수하겠다'고 제안했음에도 호텔이 지원금을 추가 신청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또 해고 노동자 12명의 총 인건비가 연 4억 원 정도였는데, 호텔은 2020년 공시지가 기준 1,200억 원(실거래가 2,000억 원 이상 추정) 넘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정리해고를 할 '긴박한 경영상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호텔 측 손을 들어줬다. 코로나19 이후 세종호텔 당기순이익은 2023년 12억 원, 2024년 32억 원으로 회복했다. 반면 고용의 질은 악화했다. 한때 정규직 직원이 250여 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정규직은 20여 명뿐이고 비정규직이 40여 명이다. 고 지부장은 "코로나19 시기 구조조정된 호텔, 관광 노동자가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았겠냐"며 "이들 대부분 1, 2년 만에 같은 업종에 돌아오지만 고용 형태는 비정규직 등 악화하는 추세"라고 꼬집었다.
156명 새로 뽑았는데, 고용승계는 못 한다?
지난달 10일 경북 구미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장에서 해고노동자인 박정혜, 소현숙씨가 '고용승계 책임져라'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소현숙씨는 고공농성 476일 만인 같은 달 27일 건강악화로 땅으로 내려왔고, 박씨가 홀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구미=홍인기 기자
'외국인 투자기업'인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 2011년부터 일한 박정혜(40)씨도 지난해 1월 8일부터 불타버린 경북 구미 소재 공장 옥상에서 488일째 농성 중이다. 여성 노동자로서 최장기다.
일본 니토덴코를 모기업으로 둔 한국옵티칼은 2022년 10월 구미공장에 화재가 나자, 생산하던 액정표시장치(LCD) 편광 필름 물량을 평택공장으로 옮겼다. 평택공장은 니토덴코의 다른 자회사 한국니토옵티칼 소유로, 박씨를 비롯한 구미공장 노동자들은 고용승계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사측은 구미공장 폐쇄와 희망퇴직을 통보했고, 거부한 노동자는 정리해고됐다. 자매기업인 니토옵티칼은 구미공장 화재 이래로 올해 3월까지 '156명'을 신규 채용했으나, 한국옵티칼 출신의 숙련된 해고노동자 7명의 고용승계 요구는 외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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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지난달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부모님이 정말 걱정을 많이 하시고 '이제 그만 내려오라'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면서 "통화를 하면 슬픔이 너무 깊어 자주 전화 드리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나홀로 싸움을 이어가는 것은 "회사를 위해 노력한 노동자가 이토록 가차 없이 버려져서는 안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고공농성 해결 없이는 민주주의도 불가능"
지난 3월 18일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 소속회원들이 서울 중구 한화그룹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형수 금속노조 경남지부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장은 상여금 지급 및 협력사 상용직 고용 확대 등을 한화오션 측에 요구하며 한화 그룹 본사 앞 철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연합뉴스
2022년 6월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고 외치며 옛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에서 51일간 파업을 벌였던 거통고 조선하청지회도 원청을 상대로 '하청노동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이고 있다. 모처럼 조선업은 호황을 맞았으나, 고되고 위험한 일을 맡는 하청노동자들은 여전히 최저임금 언저리 수준 임금을 받기 때문이다. 김형수 지회장은 "조선업 불황이 오면 하청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구원자가 되기를 요구하다가, 수천억 원의 흑자를 내면 떡고물 조금 던져준 것을 다해준 것처럼 말한다"며 지난 3월 15일부터 고공농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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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나 소수정당인 민주노동당 권영국 대선 후보, 진보당 김재연 후보가 고공농성 투쟁 사업장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거대 양당 후보들의 우선순위에서는 밀려난 상황이다. 유흥희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 집행위원장은 "고공농성자들 문제가 곧 비정규직 정리해고, 노조 탄압의 문제"라며 "노동자와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민주당의 대선 표어가 제대로 지켜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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