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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뭘까요?”
“재능을 1로 둔다면 노력은 9정도겠지.”
“그렇군요. 노력이 그렇게나…”
“운은 90이고”
언젠가 온라인에서 봤던 세컷 만화의 대사다. 나이 들수록 이 만화의 논지에 근거가 되는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재능을 1로 둔다면 노력은 9 정도’에서 끝나는 10점 만점의 세상은 대체로 고등학교를 마치면서 끝나는 것 같다. 당장 대학 입시에도 운이 엄청나게 작용한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던 90년대 초반은 제출할 수 있는 단 한장의 원서에 운을 담기 위해 007 가능하십니다 작전을 방불케 하는 눈치작전이 벌어지곤 했다. 입시제도가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뀐 올해는 등록 포기가 없어 예비 합격생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던 서울대 의대의 추가 합격생이 생긴 게 큰 화제가 됐다. 습자지보다 얇은 실력 차이로 대학이 갈리는 요즘의 입시는 예전보다 훨씬 더 크게 운이 작용한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주택담보대출 이자계산 불과 한 달도 안됐지만 어린 시절의 꿈이런가 싶은, 길었던 올 설 연휴에 ‘인생은 운’이라는 등불 같은 진리를 강렬하게 경험했다. 한마디로 애가 죽을 뻔한 썰.
주말이 끝나고 본격 연휴가 시작된 월요일 아이가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한 달 전 가슴이 아프다고 해 집 앞 내과에서 엑스레이와 심전도 검사를 받았으나 정상이 나왔던 수능10등급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휴가 직전 걸린 ‘이준혁병’(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 남자주인공)의 증상을 만끽하며 모처럼 덕질에 빠져있던 나는 “병원에서 멀쩡하다고 했잖아” 곧바로 선을 긋고는 심층 연구에 몰두하며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아이는 또 가슴이 아프고 숨쉬기가 힘들다고 했다. 빨간 날인데 병원에 가야 하나, 요새 의료 대란이 싸트고사장 라 휴일 병원 가기 힘들 텐데 고민을 할 때쯤 아이는 괜찮아졌다며 친구들과 놀러나갔다. 아이가 집을 나갔을 때야 돌아오는 가정의 평화를 누리다가 불현듯 마음 한구석이 아주 작은 돌멩이가 들어간 신발 안처럼 살짝 불편해졌다. ‘중증외상센터’에도 등장한 기흉이 아닐까? 기흉은 드라마에서처럼 외상으로 생기기도 하지만 주변에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이 드물지 않게 경 유치원 급식비 험하는 병이었다. 숨쉬기 힘들다는 말이 걸렸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통 일주일 정도 지나면 저절로 낫는 경우가 많아서 걱정할 건 아닌데 그래도 마음 편하자는 차원에서 병원 가서 엑스레이 한번 찍어봐.”
친구들하고 스케이트장에 가서 놀다가 어두워진 다음 돌아온 아이는 이제 안아프다고 했다. 스케이트까지 탈 정도고, 애도 괜찮다고 하고, 야간진료 병원 찾기도 귀찮고, 어제 하던 이준혁 심층 연구도 계속해야 하는 데 병원을 가? 말어? 30분간 고민을 하다가 주섬주섬 외투를 입었다. 다음 날은 설날. 왠지 대한민국 최대 명절에 다시 아프기라도 하면 더 골치가 아파질 거 같은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병원에 도착해 “기흉이 의심된다”며 네이버에서 검색한 의학 지식을 자랑하는 나를 뒤로하고 의사는 아이를 엑스레이 실로 보냈다.
“당장 상급병원 응급실로 가셔야겠어요.”
기흉이 심각한 상황이라 빨리 삽관 처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저렇게 멀쩡하고 활기차게 상대편에 저주를 퍼부으며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가 응급상황이라니, 나는 갑자기 티브이 의학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요? 이렇게 멀쩡한 데요? 왜 응급상황인 거죠?” 의사는 대본에 나오지 않는 대사를 하는 배우를 보는 연출자의 표정으로 “저라면 지금 119에 전화해서 응급실을 찾겠어요”라고 답했다.
불과 하루 이틀 전에 팔순 넘은 노모가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가 복막염으로 죽을 뻔한 사연을 친구에게 들은 터라 공포가 몰려왔다. 응급실 여러 곳에서 거부당해 사망한 청소년 환자 기사도 떠올랐다. 119에 문의를 하니 빅파이브 병원의 대표번호만 친절하게 문자로 왔다. 직접 구급차를 타지 않는 이상 구체적인 안내까지는 안되는 모양이었다. 우선 제일 가까운 대형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여기서 안 받아주면 그 다음은 어딜 가야 하나 불안에 떨면서.
아비규환을 상상했던 내 걱정과 달리 응급실 대기실은 조용했다. 20분 정도 기다리다가 번호를 듣고 들어가니 흉부외과 당직의가 이날 없으면 치료를 할 수 없단다. 다시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그 다음에는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지? 말로만 듣던 흉부외과 의사 부족 사태가 내 인생에까지 이렇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건가? 잠시 뒤 “흉부외과 당직의가 마침 계시네요”라는, 근래 3년 동안 들었던 가장 반가운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다시 엑스레이를 찍고 다시 방사선사의 “헉”하는 소리를 듣고(한참 뒤 아이의 전언으로) “오른 쪽 폐가 사라지다시피 쪼그라들어서 하루만 지났으면 호흡 곤란으로 실려 왔을 거”라는 의학 드라마 대사 같은 담당의의 말을 들은 뒤 아이의 가슴에는 관이 들어갔다.
설날 새벽 입원실로 옮기고 이틀 뒤 수술까지 진행됐다. 그리고 퇴원할 때까지 사흘 동안 “머리 못감아서 짜증난다” “샤워를 못 해서 찜찜하다”는 말을 하루에 이천번 가량 들으면서 나는 운에 대해서 계속 떠올렸다. 안 아프다는 아이의 말만 믿고 병원에 안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야간진료하는 병원이 집에서 멀었다면 어땠을까. 이날 이 병원에 흉부외과 당직의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병원이 가까운 데 없는 지역에 살면 어떻게 됐을까.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되던 질문은 병실에서 대만 배우이자 구준엽의 아내인 서희원의 갑작스러운 부고, 여행지에서의 독감으로 인한 지독히 불운한 죽음을 전해 들으면서 더 맹렬하게 이어졌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이렇게도 가느다란 운의 연결로 이어지거나 끝나는 것일까.
황금같은 연휴를 반납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좋았다. 야간 진료병원도 가까이 있었고, 요즘 바늘구멍보다 더 좁다는 대학병원의 응급실도 들어갈 수 있었고, 흉부외과 당직의도 있었다. 그리고 의료대란이 벌어지고는 있지만 이 모든 것이 구비된 도시에, 나라에 살고 있기도 했다. 아이에게는 비록 덕질로 한눈을 팔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어이 병원에 끌고 가는 엄마가 있었다. 이 모든 운의 조각들이 아이를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빼내 왔다.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의 저자는 우리 삶에서 운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려주는 수많은 사례를 소개하면서 스스로의 행운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우리 모두의 행운을 갉아먹는다고 말했다. 이번에 내가 겪은 응급실 사건도 위험한 시간을 비껴간 나 스스로의 행운과 의료 시스템이라는 모두의 행운(환경)이 더해져서 말 그대로 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나이 들수록 삶은 연약하고 운은 강하다는 경험치가 쌓인다. 병이나 사고 소식을 들을 때 더더욱 그렇다. 당선, 성공 같은 희소식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성공을 지원해줄 수 있는 개인적 사회적 환경이 없었더라면 갖지 못했을 행운이다. 삶 앞에 겸손해질 이유가 있는 것이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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