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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1 DB
"노 캐시. 카드 온리"
편의점(서울=뉴스1) 유수연 기자 = 오치하이 히로미 씨(여·45)는 계산대 앞에 설 때마다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돈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러나 손바닥보다 작은 카드 대신 현금을 꺼내는 건 어색했다. 일본에서는 익숙하게 현금을 쓰는 오치아이 씨지만, 한국에서는 현금을 내밀 때마다 작아지는 기분이다.
지난해 11월 28일 부산 임대아파트 뉴스1은 서울 생활 2년 차 오치아이 씨와 함께 카드 없이 현금만 사용하며 서울을 여행했다. 그는 먹고 싶었던 애플망고 케이크를 먹고 관광객들 사이에서 최고 '핫플'인 올리브영도 방문했다. 단, 규칙은 하루 종일 현금만 사용하기. 결론부터 말하면 오치아이 씨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현금으로만 살아남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두리번거려야 했다.
무기중개 버스 기사의 단호한 손바닥
이날은 크리스마스를 한 달 정도 앞둔 날이었다. 오치아이 씨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는 백화점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러 가기로 했다. 그가 선택한 이동 수단은 시내버스. 기다리던 버스의 앞문이 열리자 현금함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강렬한 빨간 글씨로 '카드 전용·현금 없는 버스'라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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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없는 버스'는 오치아이 씨의 2000원을 거부했다. 2024.11.28 ⓒ 뉴스1 유수연 기자
'전용'이라는 단어를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한 오치아이 씨가 버스에 발을 올리려고 하던 찰나였다. 손에 2000원을 두바이금융권 쥐고 있는 그를 보고 버스 기사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노" 그가 쓴 선글라스가 단호함을 더해주는 듯했다.
기사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노 캐시. 카드 온리"라고 영어로 설명한 뒤 문을 닫고 떠났다. 기자와 오치아이 씨 사이에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오치아이 씨는 민망한 듯 웃으며 "아직 돈을 내지도 않았는데 안 된다고 하셨다"며 "이런 일이 진짜 오랜만이라 조금 기분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현금 사용이 가능한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그는 "친구들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이런 일이 있어서 버스에서 내리고 그랬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아직 카드 쓰는 습관이 안 돼서 버스 카드를 잊어버리고 집에 두고 나올 때가 있다"고 멋쩍게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계좌이체를 안내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버스 운전 경력이 6~7년인 기사 이 모 씨(남·50)는 "손님이 외국인이면 곤란하다"며 "계좌이체 하라고 안내해도 못 하고 일단 태워주고 내리라고 할 수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오치아이 씨는 "요즘엔 일본 사람들이 한국 여행을 많이 오고 인스타그램에 다 나와 있다"며 "아마 이런 일을 겪는 (일본) 사람들은 처음 온 사람들이거나 나이가 많으실 것"이라고 덧붙였다.
같은 외국인이어도 고령일수록 '현금 받는 사회'를 필요로 했다. 당장 그의 어머니만 해도 카드를 전혀 쓰지 않는다.
현금 받고 사라진 영화관 직원
백화점에 도착해 영화관에서 '위키드' 예매를 시도했다. 오치아이 씨는 키오스크를 마주했다. 직원이 상주하는 매표소는 보이지 않았다.
한국 생활 2년 차인 그에게도 한국어로 된 키오스크는 여전히 어려웠다. 한국어와 영어를 지원하는 키오스크 화면에서 영어 버튼을 누르고 느릿느릿 영화를 선택했다.
결제를 앞두고 오치아이 씨의 손가락은 방향을 잃었다. 현금 결제 버튼이 없었던 탓이다. 유일한 믿을 구석인 호출 버튼을 누르자 직원이 달려와 "현금 결제는 매표소에서 도와드리겠다"고 안내했다.
영화관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던 키오스크와 달리 매표소는 작아서 찾기 어려웠다. 그는 힘겹게 직원과 소통하며 영화표를 구매했다. 직원이 실수로 영화표 2장을 선택해 가격이 3만 4000원으로 표시됐다. '어떡하지'라는 말이 담긴 표정으로 기자를 돌아본 오치아이 씨.
기자가 "저는 관람객이 아니다"라고 설명하자 직원이 정확한 가격을 안내했다. 힘겹게 직원과 소통하며 구매한 영화표는 1만 7000원. 마지막 남은 2만원을 지불했다.
그러나 현금 수납기(돈통)가 '땡'하고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2만원을 받은 직원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영화관 직원은 매표소 뒤편 공간에서 3000원을 가지고 있다. 돈통이 따로 없는 모양이었다.
계산을 마친 후 오치아이 씨는 그는 "외국에서 카드를 쓰면 잘못 소통하다 나도 모르게 큰 금액을 쓸지 걱정된다"며 "특히 내 친구들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 큰 금액을 써버릴까 봐 현금을 쓰고 싶어 한다. 현금을 내면 자기가 얼마나 내는지 알 수 있지 않나"고 말했다.
오치아이 씨는 빠른 속도로 상인과 소통해야 하는 곳에 가면 여전히 현금을 내밀고 꼭 영수증을 받는다. 얼마 전 전통시장에서 카드를 내밀었다가 상인의 실수로 1000원을 더 지불한 후부터 '카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더 커졌다. 한국어 회화가 능숙한 그도 이런데, 한국을 처음 방문한 관광객들은 오죽할까.
31일 오후 서울 성동구의 한 극장을 찾은 어르신들이 키오스크(무인단말기) 이용에 앞서 한참 바라보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2024.10.31/뉴스1 ⓒ News1 박정호 기자
우리가 맞닥뜨린 벽, '키오스크'
오치아이 씨가 꼭 가고 싶었다는 올리브영N성수점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요즘 일본인들이 한국에 방문하면 꼭 오고 싶어 하는 'K-뷰티' 성지다.
먹거리 판매대 앞에서 턱에 손을 올리고 고민하던 그는 4800원짜리 콤부차를 구매했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대기 줄이 없는 무인계산대로 향했다.
한국 생활에 익숙해졌다는 오치아이 씨가 바코드를 찍고 결제하기 버튼을 눌렀다. 능숙한 손길도 잠시, 그의 손가락은 현금결제 버튼을 찾아 방황했다. 결국 손가락은 '직원 호출' 버튼을 향했다.
오치아이 씨에게 다가온 직원은 현금의 'ㅎ' 자를 꺼내자마자 일반계산대로 가달라고 안내했다. 키오스크에 현금결제 버튼이 없었던 탓이다.
계산을 마친 후 오치아이 씨는 '키오스크'라는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일본 역시 편의점에 무인 계산대를 도입하면서 노인들이 고민을 겪고 있다며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일본은 항상 키오스크에 현금이 들어갈 수 있게 한다"며 현금을 쓰지 못해 불편을 겪을 일은 없다고 전했다.
'현금결제' 버튼이 없어 방황하는 오치아이 씨의 손가락. 2024.11.28 ⓒ 뉴스1 유수연 기자
외국인 많이 찾는 '핫플'은 현금 환영
오치아이 씨는 가고 싶었던 카페가 있었다며 들뜬 걸음을 옮겼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 2가의 한 카페. 앞선 외국인 손님이 현금을 지불하자, 직원은 익숙한 듯 잔돈을 거슬러줬다.
그는 흰 봉투에서 만 원 2장과 1000원 1장으로 커피값을 지불했다. 능숙하게 거스름돈을 내민 직원은 "성수는 외국인이 많아서 (현금 쓰는 손님들이) 그래도 꽤 된다"며 "잔돈은 항상 준비해 놓는 편"이라고 말했다.
인사동에서 떡집을 운영하는 50대 여성 A 씨는 "요즘 노인이고 외국인이고 누가 현금을 쓰냐"면서도 "기본 잔돈은 비치돼 있다"고 말했다.
현금 없이는 불친절한 서울 여행이었지만, 외국인들이 찾는 일부 '핫플'에서는 현금 사용이 가능했다. 외국인 관광객 중 현금을 쓰는 사람이 제법 된다는 방증이었다.
"현금 쓸 수 있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루 종일 진땀을 뺀 오치아이 씨는 "오랜만에 현금만 쓰니까 불편함을 느꼈다"며 웃었다. "한국에 살다 보니 이젠 카드가 편하다"고 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무래도 외국인은 카드가 없을 때도 있으니까, 현금을 많이 쓸 수 있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감을 묻자, 오치아이 씨가 이같이 답했다. 거절과 방황으로 하루를 채운 탓일까. 그는 민망한 듯 웃으며 소심한 당부만을 남겼다.
기자는 그의 당황을 옆에서 지켜보며 소비자임에도 당당할 수 없는 이들이 떠올랐다. '현금 없는 사회'로의 빠른 전환 대신 노인, 어린이, 외국인 등 현금이 익숙한 사람과 보조를 맞출 순 없는 걸까.
오치아이 씨에게 일본 정부도 '현금 없는 사회'로 전환을 추진 중이지 않냐고 묻자, 그는 "일본에 자주 가는데 아직도 현금을 많이 쓰는 분위기"라며 "지난달에 한 번 다녀왔는데 새로운 화폐(신권)가 나왔다"고 의아해했다.
shushu@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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